2026-08-17
올여름 전례없는 폭염이 유럽 전역을 덮쳤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 스페인 등지에서 연일 최고 기온이 경신되는 가운데, 포르투갈은 무려 47℃에 달하는 살인적인 기온에 폭염 경보를 발령하기도 했다. 이처럼 열돔 현상이 유럽을 휩쓸자, 더위를 견디다 못한 소비자들 사이에서 냉방 제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유럽의 냉방 수요가 갑자기 늘면서 중국과 한국 기업 모두 특수를 누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에어컨 판매량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고, 유럽 수출용 제품을 생산하는 LG전자의 한국 창원 공장 라인은 지난 4월 이후 풀가동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유럽 시장을 무대로 한 중국 기업들의 가파른 성장세가 업계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메이디(美的, 마이디어), 거리(格力, 그리), TCL 등은 올해 유럽 시장 주문량이 크게 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품귀 현상과 함께 설치 대기 행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에어컨 침투율이 극히 낮은, 이른바 ‘에어컨 불모지’에 가깝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은 오랫동안 약 20% 수준에 머물러 왔다. 대다수 유럽 가정에서 에어컨 설치는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높은 설치 비용과 복잡한 시공 절차, 건축물 구조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유럽 시장에서 중국 에어컨 기업들은 어떻게 유럽의 ‘폭염 특수’를 기회로 삼아 단기간에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을까?

메이디 광저우(廣州) 공장의 포타스플릿 에어컨 생산라인에서 작업자가 출하 전 조립 공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진/메이디 제공
유럽에 필요한 것은 ‘에어컨’보다 ‘솔루션’
유럽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냉방 문제는 단순히 ‘에어컨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편리하게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기존의 이동식 에어컨은 별도의 시공이 필요 없는 대신, 부피가 크고 소음이 심한 데다 냉방 효율마저 떨어진다는 고질적인 한계가 있다. 반면 냉방 성능이 뛰어난 실외기 분리형(스플릿) 에어컨은 막대한 설치 비용과 기나긴 대기 시간이 발목을 잡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전문 자격증을 보유한 기술자가 에어컨 한 대를 설치하는 데 받는 비용은 1000~2000유로(약 172~344만 원)선으로, 때에 따라서는 에어컨 제품 가격을 웃돌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유럽은 낡은 건물과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 많아 외벽 개조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데다 국가와 지역마다 창문 구조도 달라 에어컨 설치의 진입장벽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지 맞춤형 수요에 주목한 중국 기업들은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슝쉐친(熊學勤) 메이디 에어컨 유럽 사업 총괄은 인터뷰에서 “메이디가 유럽 시장을 겨냥해 출시한 이동식 분리형 에어컨 ‘포타스플릿(PortaSplit)’의 올해 출하량이 20만 대를 돌파했고, 판매량도 지난해보다 두 배 늘었다”라고 밝혔다. 이 제품은 지난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25년 최고의 발명품’에 이름을 올렸으며, 중국 국내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유럽 규제의 틈새를 공략한 혁신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슝 총괄은 “일반 성인이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도록 실외기 무게를 10kg 이내로 철저히 제한하는 한편, 컴프레서(압축기)를 실내기로 과감히 옮겨 실외기를 극도로 가볍고 작게 만들었다. 그래서 규격이 제각각인 유럽의 다양한 창문에도 무리 없이 거치할 수 있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컴프레서를 실내기에 내장하면서 발생하는 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팀이 1~2년에 걸쳐 소음 저감 솔루션을 완성했다”라며 “저소음 설계와 무타공, 전문 기사 없는 셀프 설치, 자유로운 탈부착 및 운반 등 유럽의 주거 환경을 철저히 분석해 반영한 설계가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관통했다”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현지 맞춤형 혁신은 중국 에어컨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핵심 전략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이얼(海爾, Haier)은 설치와 분해, 수리가 모두 간편한 프리미엄 벽걸이형 에어컨 ‘엑스퍼트(Expert)’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나사 하나로 분해 가능한 모듈러 설계를 적용해 에어컨 설치 시간을 기존 대비 약 50%까지 대폭 단축했다. TCL 에어컨 역시 간편한 설치와 에너지 절감, 저소음, 고효율, 스마트 기능 등 유럽 시장의 수요에 맞춰 제품군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으며, 분리형 에어컨과 소형 상업용 에어컨 전 제품에 AI 절전 기능을 탑재했다.

이탈리아의 한 매장에 진열된 메이디 포타스플릿 이동식 분리형
공급망 경쟁력에서 현지화 운영까지
제품 혁신으로 유럽 시장의 문을 연 중국 기업들은 이제 공급망 구축과 신속한 납기, 현지화 운영 역량을 앞세워 시장 안착과 영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 에어컨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품 생산부터 완제품 조립까지 고도로 집적된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컴프레서와 모터 등 주요 부품에서도 핵심 특허와 생산능력을 높은 수준으로 확보하고 있다. 또한 설계부터 제조까지의 공정이 같은 도시권, 심지어 같은 산업단지 안에서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속도전에서도 중국 제조사의 물류 효율은 단연 눈에 띈다. 슝 총괄은 “지난 5월 말 해상운송을 통해 선적한 포타스플릿 에어컨 추가 물량 일부가 이미 유럽 항구에 도착해 통관 절차를 밟고 있다”라며, “나머지 긴급 물량은 공장에서 연장 근무를 통해 생산한 뒤 중국-유럽 화물열차(CRE)로 운송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운송 기간은 15~25일로, 해상운송보다 약 25일 단축된다”라고 덧붙였다.
TCL 에어컨 역시 유럽 냉방시장 특수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TCL 관계자는 중국-유럽 육로 화물 전용 노선과 CRE를 활용한 유럽 직송 체계를 가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통상 30~40일이 소요되던 생산 주기도 최단 10일로 단축해, 현지 공급 부족 해소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중국 일부 지역의 세관 당국도 가전제품 수출 통관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광둥(廣東) 장먼(江門)의 경우, 세관이 ‘냉방 가전’ 전용 신고 창구를 개설해 관련 제품의 신속한 통관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1~5월 장먼의 대(對)유럽 에어컨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5.4% 증가한 8억 8000만 위안(약 1936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해외 시장에서는 제품을 현지에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장기적인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지화된 서비스 역량에 달려 있다. TCL 에어컨 관계자는 유럽 사업에 ‘차별화된 지역별 운영 모델’을 가동 중이라고 전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에서는 직영 법인을 설립해 현지 시장 맞춤형으로 대응하고, 동유럽 시장에서는 이미 검증된 현지 대리점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체 유통망을 촘촘히 메우는 투트랙 전략이다. 슝 총괄 또한 포타스플릿 제품이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현지 법인이 통관을 서둘러 진행하고 최대한 빠르게 현지 유통 채널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채널에서도 현지 배송 체계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징둥닷컴(京東, JD.com) 산하의 유럽 온라인 소매 플랫폼 조이바이(Joybuy)를 예로 들면, 자체 물류창고와 조이익스프레스(JoyExpress) 배송 네트워크를 통해 대형 가전을 주문한 소비자는 이르면 다음 날 제품을 받아볼 수 있다. 이 같은 배송 체계는 소비자의 대형 가전을 구매할 때의 편의성을 한층 더 높여 주고 있다.
‘제조 경쟁력’에서 ‘사용자 가치’로
기상 예측에 따르면 유럽은 앞으로 수개월 이상 고온 현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이상 기후의 빈도가 높아지고 생활 수준 향상에 따라 냉방 가전에 대한 유럽 시장의 수요는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은 앞으로 유럽 시장의 핵심 경쟁력이 단기적인 냉방 수요 대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라이프 스타일에 최적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메이디 에어컨 유럽 제품 담당 자오아리(趙阿立) 매니저는 “향후 현지화 혁신을 지속해서 서유럽 시장의 특수한 구조적 니즈를 반영한 포타스플릿과 같은 현지 맞춤형 제품 개발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이신(海信, 하이센스) 역시 설치 편의성을 높인 라인업을 꾸준히 확대하는 한편, 에너지 효율과 저소음 성능을 높이는 등 제품 경쟁력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국가와 지역마다 소비 성향과 시장 환경이 다른 만큼, 중국 제조 기업들은 과거의 ‘표준화된 제품 공급’에서 ‘현지 맞춤형 솔루션 제공’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 이처럼 사용자 요구에 기반한 기획력과 탄탄한 공급망 역량을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경쟁력은, 중국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는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글 | 천커(陳珂)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