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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신 곽광과 고대 한국


2026-07-10      

곽광(霍光, 생년 미상~기원전 68년)은 중국 서한(西漢) 시대의 명신으로 자는 자맹(子孟)이다. 이복형은 흉노를 정벌한 명장 곽거병(霍去病)이고 외손녀 상관씨(上官氏)는 한소제(漢昭帝)의 황후였다. 곽광은 <케임브리지 중국 진(秦)·한(漢)사>에서 한나라의 가장 유명한 정치가로 꼽혔고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역사 속 곽광

곽광은 어린 시절 형 곽거병을 따라 시골에서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생활했다. 곽거병이 세상을 떠난 후 한무제(漢武帝)에게 중용돼 20여 년 동안 궁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붕어하고 당시 여덟 살이던 유불릉(劉弗陵)이 한소제로 즉위하자, 곽광은 상관걸(上官桀) 등과 함께 섭정하며 국정을 보좌했다. 이후 상관걸은 곽광을 몰아내기 위해 한소제 앞에서 비방과 모함을 일삼았으나 한소제는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곽광의 충성을 더욱 굳게 신뢰했다. 이후 곽광은 정적을 제거하고 한소제를 보필하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기원전 74년 한소제가 붕어하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유하는 즉위 27일 만에 폐위됐는데, 사서에서는 그가 어리석고 무능하며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몇 년 전 해혼후(海昏侯) 묘지 발굴을 통해 유하가 실제로는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그의 폐위 사유가 무능이나 정신 이상이 아닌 곽광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후 곽광은 민간에서 자란 한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다. 이를 계기로 곽광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한선제는 겉으로는 곽광을 극진히 예우했으나, 매번 곽광을 마주할 때마다 등에 가시가 돋친 듯 고통스러웠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가 바로 ‘망자재배(芒刺在背)’다.


한선제가 민간에서 함께 살았던 아내 허평군(許平君)을 황후로 책봉하자, 곽광의 아내는 이에 불만을 품고 태의를 매수해 허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 곽성군(霍成君)을 새 황후로 앉혔다. 이때 곽광은 사건의 진상을 깊이 추궁하지 않은 채 넘어갔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황후 사망의 진상이 드러났고 이를 알게 된 한선제는 곽 씨 일가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곽씨 가문은 반란을 꾀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내 일족이 몰살당하는 참담한 결말을 맞았다. 곽광이 평생 나라에 충성을 다했음에도, 가족의 전횡을 묵인한 탓에 결국 일족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후대 사람에게 깊은 한탄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선제가 곽광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기원전 51년 한선제는 서한의 중흥을 도운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미앙궁(未央宮) 기린각(麒麟閣)에 걸도록 했는데, 곽광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기린각은 고대 공신을 기리는 문화적 상징이 됐다. 그 뒤로도 서한의 역대 황제들 모두 곽광을 각별히 존숭했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말년에 병세가 깊어지자, 대신들이 곽광처럼 어린 태자 이치(李治)(후에 당고종·唐高宗)를 보필해 주기를 바랐다. 이는 이세민이 곽광을 충신의 모범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원(元)나라 잡극 작가 양재(楊梓)가 지은 <승명전곽광귀간(承明殿霍光鬼諫)>은 곽광이 죽은 뒤 혼령이 되어 한선제에게 간언하고, 자기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것을 알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은 곽광의 충신 이미지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명(明)나라 때 건립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상하이(上海) 성황묘(城隍廟) 전전(前殿)에는 곽광이 배향돼 있으며, 민간에서는 그를 신처럼 모셔 왔다.


곽광 고사와 고대 한국의 정치

고려 의종 시기, 문신 김존중은 종친들이 왕위를 넘보지 못하도록 어린 태자에게 두 명의 스승을 두어 이들이 태자를 보호하게 하자는 방안을 의종에게 건의했다. 이는 한나라의 명신 곽광이 어린 황제를 보좌한 고사를 본뜬 것이었다. 이때 김존중이 추천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최윤의였다. 명문가 출신 최윤의는 고려 최초의 예전(禮典)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묘지명에는 ‘공과 업적을 헤아리기 어렵다’며 그를 ‘한나라의 곽광 같은 인물’이라고 칭송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최윤의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올랐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윤소종이 이성계에게 <곽광전(霍光傳)>을 바치자, 이성계는 사람을 시켜 이를 낭독하게 했다. 이는 이성계가 곽광의 선례를 따라 어린 임금을 폐위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를 대외에 드러낸 행위였다. 한편 고려 명신 최영을 모신 개성 덕적산 사당에서도 곽광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비문에서는 최영을 곽광에 비유하며 생전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말년의 결말이 안타깝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최영이 <곽광전>을 읽고 교훈을 되새겼더라면 목숨을 잃고 나라가 멸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한다.


조선 시대에도 곽광은 중요한 정치적 비유의 대상이었다. 1400년 권근 등 대신들은 정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과거 곽광이 황제를 폐위한 것은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하며, 상왕 이성계의 선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76년 무령군 유자광은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곽씨 가문의 사례를 들어 좌의정 한명회 가문의 전횡을 비판했다. 1507년에는 대사간 강경서 등이 중종에게 충신을 신뢰해야 한다고 간언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만약 한소제가 어리석은 군주였다면 곽광 같은 현명한 신하도 역적으로 몰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545년 어득강은 중종을 추모하는 만장(挽章)에서 연산군을 창읍왕 유하에, 중종을 옹립한 반정 공신들을 곽광에 비유했다.


이후에도 이런 인용은 계속됐다. 1661년 탄핵 상소가 빗발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한 송시열에게 현종은 한소제가 곽광을 신임한 고사를 들어 그를 만류했다. 1728년 영조 역시 같은 고사를 인용해 영의정 이광좌에 대한 신임을 드러냈다. 1790년 정조는 신하들에게 곽광이 충신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으로 간신들이 종종 곽광의 이름을 빌려 군주를 좌지우지하려 했다고 경고하면서 군권(君權)의 신성 불가침을 강조했다. 1833년 예조판서 조만영은 상소문에서 정조가 김조순에게 순조를 보좌하도록 한 일을 한무제가 곽광에게 어린 황제를 부탁한 것에 비유했다.


고대 한국 시문 속 곽광

고려 말 문신 이첨은 <곽광론(霍光論)>에서 천 년여 동안의 충신과 의인들조차 곽광과 견주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곽광이 가문의 죄를 감싸다 결국 멸족을 초래한 점을 들어 그가 군자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인(仁)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조선 시대 문인들도 곽광을 자주 언급했다. 이행은 <평성부원군만사(平城府院君挽詞)>에서 박원종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한 공을 두고 ‘그 공이 어찌 곽광에 미치지 못하겠는가’라고 평가했다. 김상헌은 <유문성공화상찬(柳文成公畫像贊)>에서 중종 옹립에 참여한 유순정을 ‘곽광의 충성심을 품은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이익상 역시 <만연양부원군(挽延陽府院君)>에서 이시백을 가리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행위가 ‘곽광과 같으며, 그 공로가 기린각의 첫째로 꼽힌다’고 평가했다.


문신 김춘택은 <엄연년핵주곽광(嚴延年劾奏霍光)>에서 곽광이 유하를 폐위하고 한선제를 옹립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조치였지만, 엄연년이 이를 이유로 곽광을 탄핵한 것은 강직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를 통해 군주가 공적인 명분을 내세워 사익을 추구하는 소인배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인 박윤원은 <역대명신상찬·곽광(歷代名臣像贊·霍光)>에서 곽광의 단정한 용모를 찬양하며 그를 ‘기린각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학자 이종휘는 <곽광론>에서 곽광을 국가의 위기를 능숙하게 수습한 사직의 신하라고 평가했다.


조귀명은 <곽광론>에서 곽광이 성현의 자질을 갖추진 못했으나, 한무제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군주를 보필하고 유하를 폐위한 뒤 선제를 옹립하는 등의 행위가 천하의 의심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행동이 오로지 공적인 마음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가 국정을 보좌하던 시기 천하가 안정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 공적이 이윤(伊尹), 주공(周公)에 견줄 만하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곽광은 중국과 한국 모두에서 권신과 충신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기억된다. 그는 군주를 보좌한 충신의 전형이자, 막강한 권력을 쥔 권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곽광은 고대 동아시아 정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남아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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