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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과 중국 역사 속 오월국


2026-06-11      

올해 초 중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태평년(太平年)>이 큰 인기를 끌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 특히 오월국(吳越國)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월국과 고대 한국 사이에는 묻혀 있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적지 않다.




오월국의 역사

907년 주원(朱溫)이 당(唐)나라를 찬탈하면서 중국은 오대십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오월국은 당시 ‘십국’ 가운데 하나로 907년 전류(錢鏐)가 세운 나라이고 수도는 항주(杭州)이다. 3대 5왕인 전류, 전원관(錢元瓘), 전좌(錢佐), 전종(錢倧), 전숙(錢俶)을 거쳐 978년 스스로 영토를 송(宋)나라에 바치며 총 72년간 존속했다.


전류(852~932년)는 재위 기간 동안 ‘보경안민(保境安民,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정책을 내세워, 비교적 안정된 정세를 유지했다. 그는 수리 사업에도 힘썼다, 전당강(錢塘江) 제방을 축조하고 태호(太湖)와 각지의 하천과 수로를 준설하면서 농업 생산 또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백성의 삶도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중원 지역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오늘날 항저우의 번영은 바로 이 시기에 기틀을 다진 것이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전숙(錢俶, 929~988년)은 재위 기간 북송(北宋)의 천하 통일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직면하자, 스스로 ‘영토를 송나라에 바친다(納土歸宋)’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오월국이 송나라에 편입되면서 평화 통일이 이뤄졌다. 이러한 결단은 장강(長江) 이남 지역이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월국의 역대 국왕들은 특히 수신치가(修身治家)를 중시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전류의 가훈 중 “이익이 자신에게만 돌아가는 일은 도모하지 말고(利在一身勿謀也), 천하에 이익이 되는 일은 반드시 도모하라(利在天下者必謀之)”는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이런 전통으로 전씨 가문은 오랜 세월 번성하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천년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오월국과 신라·후백제·고려의 교류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따르면 신라를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가 한때 오월국 군주 전류의 책봉을 받고 그를 군주로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오월국과 신라 사이의 정치 관계가 비교적 긴밀했음을 보여준다.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와 오월국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다. 후백제 국왕 견훤은 오월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정치적 지원을 요청했다. 918년 고려가 건국된 뒤 후백제와 고려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후백제는 전세에서 밀리자, 오월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이에 오월국 사신은 고려 측에 전류의 뜻을 전달하고 양국이 “서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영원히 화평을 누리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오월국의 조서를 받은 왕건은 견훤에게 편지를 보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오월국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935년 신라 경순왕(김부)이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들어가 신하의 예를 갖췄다는 것이다. 이에 왕건은 장녀 낙랑공주를 김부에게 시집보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고려에 귀부(歸附)한 일을 오월국이 ‘영토를 송나라에 바쳤다’라는 사례와 같은 의거라고 간주하며, 신라가 조정에 공을 세우고 백성에게는 덕을 베풀었다고 칭송했다. 조선 시대의 서거정 역시 <경주십이영(慶州十二詠)>에서 “김 씨 왕이 영토를 바친 것은 전왕(錢王)과 같다”라는 시구를 남겼다.


해상 무역의 번영으로 양방향 인적 교류가 확대됐다. 적지 않은 오월국 문인이 바다를 건너 고려로 가 관직에 나아갔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919년과 923년 오월국 출신 문인 추언규(酋彦規)와 박암(朴巖)이 고려로 건너가 관직에 올랐다. 반대로 신라인 장유는 전란을 피해 오월국으로 피신했다. 중국어를 배운 뒤 귀국했으며 이후 고려 광종에게 등용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업무를 맡았다. 또 고려 문신 최행귀는 오월국을 유람하고 오월국 왕으로부터 비서랑이라는 관직을 받은 뒤 고려로 돌아가 다시 중용됐다.


불교문화 교류 역시 양국 교류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오월국 국왕 전숙은 일찍이 고려에 사람을 보내 고대 불경 판본을 찾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해동에서 잃어버린 경서를 구하려한 일(求遺書於海東)’이다. 이에 고려는 승려 체관을 오월국 천태산(天台山)으로 보내 불경을 전하고 불법을 전수하게 했다. 또 고려 승려 의통은 10세기 중반에 천태산에서 불법을 펼쳤다. 전종의 장남이자 전숙의 양자인 전유치(錢惟治)는 그에게 여러 차례 불법을 배우고 스승의 예로 대했다. 927년 전류는 항주 서호(西湖) 인근에 혜인사(慧因寺)를 세웠다. 그로부터 150여 년 뒤 고려 왕자 의천이 이곳에서 수행했고, 사재를 털어 화엄경을 보관할 전각인 장경각을 건립했다. 이를 계기로 이 사찰은 오늘날까지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이 바라본 오월국

조선 시대 국왕과 사대부는 오월국의 역사와 고사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도 자주 활용했다.


조선 왕조의 군주들은 오월국의 치세를 거울삼아 국정 운영의 참고로 삼곤 했다. 1638년, 최유해는 인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오월국의 왕 전류가 백성을 긍휼히 여긴 일화를 언급했다. 전류는 좋은 정책이 떠오르면 곧바로 종이에 적어두었고 잠들기 전까지도 끊임없이 국정을 고민했기 때문에 오월국이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며 인조 역시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간청했다. 1726년, 영조는 대신들과 대화하던 중 오월국을 언급하며 비록 나라는 작았지만, 백성을 해치는 정치는 없었고 국고에는 10년 치 비축이 있었으며 후손들 또한 오랫동안 복을 누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당시 해마다 재정이 부족하고 병력과 식량마저 모자랐던 조선의 상황을 지적하며, 오월국의 검약 정신과 절약 정책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시독관 윤심형은 영조에게 전숙의 낮은 조세와 애민 정책을 본받을 것을 제안했다. 즉, 황무지 개간을 장려해 세금을 거두지 않고 영남 지역 백성의 세금을 감면해야한다고 주청했다.


오월국의 고사는 조정에서 토론할 때 참고 사례로도 자주 활용됐다. 1660년, 현종은 대신들과 함께 <송감(宋鑑)>을 읽으며 송나라 재상 조보(趙普)가 사적으로 오월국의 선물을 받은 일을 두고 대의를 훼손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를 통해 신하들에게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경계하도록 일침을 가했다. 1723년, 조태억은 송나라 황제가 오월국 국왕의 능묘를 수리한 고사를 언급하며 경종에게 고려 태조 능묘 바깥의 석상생(돌로 만든 문인·무인·동물 상) 등을 정비할 것을 건의했다. 1771년과 1780년에는 대신들이 잇달아 같은 고사를 인용해 고려 태조 능묘의 묘도를 보수하고, 신라 경순왕(김부)의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지을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전류가 ‘1만 개의 활로 화살을 쏘아 조수를 물리쳤다(萬弩射潮)’라는 전설도 고대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귀명의 <제정원백절강관조도(題鄭元伯浙江觀潮圖)>에 따르면 조선 사람 대부분이 전류의 조수 퇴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성대중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전류가 화살을 쏴 조수를 물러가게 했다는 고사를 언급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힘이 어느 정도는 자연에 맞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월국의 역사는 오래전에 막을 내렸지만, 고대 한국과의 교류에서 남긴 여러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중한 양국이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이자 현재 양국 간 문화 교류에도 소중한 역사적 자산을 남겨주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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