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30
원앙은 고대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서로운 새다. 부부나 연인 사이의 깊은 애정을 상징해 큰 사랑을 받았다.

고대 중국 문화 속 원앙
선진(先秦) 시대부터 고대 중국인은 원앙을 길조(吉鳥)로 여겼다. <시경·소아(詩經·小雅)>에는 “원앙이 함께 날아오르니, 그물을 쳐 이를 잡도다. 군자가 만수무강하시어 복록을 누리시기를(鴛鴦于飛 畢之羅之 君子萬年 福祿宜之)”이라는 구절이 있다. 서한(西漢) 시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과부 탁문군(卓文君)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유명한 부(賦, 중국 고대의 산문체 시 혹은 운문체 설명문)인 <봉구황(鳳求凰)>을 지었다. 여기에 나오는 “어찌하면 서로 목을 비비는 원앙이 될 수 있을까(何緣交頸爲鴛鴦)”라는 애틋한 고백은 ‘어떻게 해야 당신과 금실 좋은 부부가 될 수 있겠냐’라는 뜻이었다. 이후 원앙은 사랑을 상징하는 문학적 아이콘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한(漢)나라 시대의 시가 <고시십구수·객종원방래(古詩十九首·客從遠方來)>에는 “화려한 무늬의 원앙 한 쌍을 수놓아 합환이불을 지었네(文采雙鴛鴦 裁爲合歡被)”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원앙 한 쌍을 수놓은 비단으로 부부의 신혼 이불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동진(東晉) 시대의 <수신기(搜神記)>에는 전국(戰國) 시대 송(宋)나라 강왕(康王)이 신하 한빙(韓憑)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자 부부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고, 그들의 혼백이 한 쌍의 원앙으로 변해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었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당(唐)나라 시인 노조린(盧照鄰)은 “신선을 부러워하지 않고 한 쌍의 원앙이 되기를 원한다(願做鴛鴦不羨仙)”라는 명구를 남겼다. 이 강렬한 한 줄로 원앙이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문화적 깊이는 더 공고해졌고, 후대 문인들이 이를 오마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혼례용품에도 원앙 문양이 대세로 자리 잡으며 원앙 베개와 원앙 이불, 원앙 비단 등이 신혼방을 채웠다.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는 사패명(詞牌名)으로 ‘원앙몽(鴛鴦夢)’, ‘원앙원(鴛鴦怨)’ 등이 널리 쓰였다. 원(元)나라 잡극 <옥청암착송원앙피(玉清庵錯送鴛鴦被)>는 ‘원앙 이불’이라는 핵심 소품을 통해 엇갈린 인연과 혼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중국까지 이어져 ‘원앙호접파(鴛鴦蝴蝶派)’라는 문학 유파가 등장했는데, 재자가인(才子佳人)을 주인공으로 한 통속 연애소설을 집필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처럼 깊이 뿌리내린 원앙의 이미지는 점차 일상의 영역으로도 확장했다. 중국 전통 건축에서 정교하게 맞물리는 짜맞춤 구조인 장부이음은 그 틈 없는 결합력 때문에 ‘원앙고리’라는 다정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말 속에 담긴 해학도 흥미롭다. 성어 ‘봉타원앙(棒打鴛鴦)’은 금실 좋은 부부나 연인을 억지로 갈라놓는다는 뜻이고 ‘난점원앙보(亂點鴛鴦譜)’는 혼처를 잘못 맺어주어 낭패를 봤다는 의미로 쓰인다. 유가(儒家)에서는 원앙을 ‘부부유의(夫婦有義)’를 상징하는 고결한 존재로 보았다. 원앙은 한 번 인연을 맺으면 평생 배우자를 바꾸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부의 연을 넘어, 원앙은 형제나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을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널리 쓰였다. 남조(南朝) <소명문선(昭明文選)>에 수록된 한나라의 소무(蘇武)와 이릉(李陵)이 주고받은 시를 보면, “예전에는 원앙 같았건만, 이제는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서로 멀어졌구나(昔爲鴛和鴦 今爲參與商)”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과거에는 원앙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막역한 사이였으나, 지금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별처럼 아득히 멀어진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원앙은 전쟁터에서 승리를 이끄는 진법 명칭에도 쓰였다. 명(明)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은 좌우 대칭의 진형으로 공격과 방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신식 전술인 ‘원앙진(鴛鴦陣)’을 창안했다. 원앙처럼 짝을 이룬 병사 10여 명을 한 조로 편성해 각각 무기와 방패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협동하도록 함으로써 왜구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 유비가 휘두르던 무기 역시 보검 한 쌍으로 이뤄진 쌍고검(雙股劍) 일명 ‘원앙검(鴛鴦劍)’이라고 불렸다. 그의 보검은 쇠도 단숨에 끊어낼 만큼 날카로웠다고 전해진다. 소설 <홍루몽(紅樓夢)>에도 ‘원앙검’이 등장하며 현재 쓰촨(四川)박물원에 실물 원앙검이 소장돼 있다. 충칭(重慶) 사람들은 큰 훠궈(火鍋) 냄비를 칸막이로 나눠 각각 얼얼한 매운맛과 담백한 맛의 육수를 함께 담아내는데, 이를 원앙 훠궈 또는 원앙 궈(鍋)라고 한다. 식성이 다른 이들이 한 식탁에 다정하게 둘러앉아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원앙처럼 화합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원앙은 서구 세계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럽 박물학자들이 처음으로 원앙을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했는데, 특히 원앙 수컷의 화려한 깃털이 고대 중국 관리의 관복을 연상시킨다고 보았다. 이에 원앙을 영어로 ‘만다린 덕(Mandarin Duck)’이라고 번역했다. 원앙은 서양인의 시선 속에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새로 뚜렷하게 각인됐다.
고대 한국 문화 속 원앙
고대 한국인도 원앙을 사랑의 상징으로 여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음악가 옥보고(玉寶高)는 거문고 연주에 뛰어나고 음악 이론에도 정통해 30곡의 명곡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원앙곡(鴛鴦曲)>이다. 제목으로 미뤄볼 때 부부의 금실을 노래한 곡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이 곡이 옥보고가 당나라의 비파 연주곡인 ‘원앙조(鴛鴦調)’를 참고해 창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당악(唐樂) <천추세(千秋歲)>는 “원앙 문양이 수놓아진 장막 안에서 원앙 문양 이불을 덮고, 원앙 베개를 베고 누워 원앙처럼 함께 잠드니 이와 같이 천년만년 살고 싶다(鴛鴦帳裏鴛鴦被 鴛鴦枕上鴛鴦睡 似恁地 長恁地 千秋歲)”라는 가사로 변치 않는 사랑을 간절히 바랐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기씨 성을 가진 관리의 집에서 경치를 감상하던 중, 연못을 유유히 헤엄치는 원앙을 보고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며 이렇게 시를 읊었다. “강과 호수의 풍경을 그리워하지 말고, 원앙 한 쌍이 만족스럽게 노니는 이 모습을 보소서(憑公莫憶江湖景 看取鴛鴦得意時).”
조선 연산군은 직접 지은 시에서 “비가 그치자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거두고, 연못의 둥근 잎이 원앙을 덮고 있네(雨後涼颷歛暑光 嫩池圓葉蓋鴛鴦)”라고 노래했다. 이는 신선의 세계에 있는 듯한 여유로운 정취를 묘사한 것으로 조선 궁중에서도 원앙을 길렀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은 송나라 경전에 수록된 예법을 받아들여 대신들이 국왕을 알현할 때 동·서로 나뉘어 서로 마주 보고 절을 하도록 했는데, 이를 ‘원앙배(鴛鴦拜)’라고 불렀다.
원앙은 조선의 대외 교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예물이었다. 1474년 성종은 대마도 사신을 접견하고 비단과 모피, 공예품과 살아 있는 원앙 한 쌍을 하사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원앙 등 야생 조류를 사육하는 방법이 기록돼 있는데, 원앙알을 암탉이 품어 부화시키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밖에 명나라의 군사 전술 원앙진도 조선에 전해졌다. 1603년, 명나라 사신은 선조에게 조선이 명나라의 원앙진을 익히면 왜구를 방어하는 전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원앙과 고대 한국의 서정시
<파한집(破閑集)> 기록에 따르면, 고려 예종 때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연못 위 원앙은 쌍을 지어 떠다니는데 누가 저 새를 몰아내어 내 이별의 시름을 풀어주랴(池上鴛鴦成雙浮 何人驅此鳥 使我解離愁)”라는 시를 지어, 짝을 이룬 원앙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했다. 월산대군 이정 또한 <원앙>이라는 시를 써, 원앙은 늘 짝을 지어 다녀 인간의 이별하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고 표현했다. 조선 정조도 <원앙>이라는 시에서 “원앙이 지나니 물결이 생기고, 날개를 나란히 하며 함께 날아오른다(鴛鴦戲紋漾 比翼同翺翔)”라고 노래하며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동경을 담아냈다.
권우는 <칠석(七夕)>에서 ‘오작교(烏雀橋)’와 ‘원앙 베개’를 통해 견우와 직녀가 재회하는 다정한 모습을 그려냈다. 서거정은 <춘규원(春閨怨)>에서 “반쯤 덮인 이불에 수놓인 한 쌍의 원앙마저 세월에 빛을 잃었다(半被老卻雙鴛鴦)”라고 읊었으니, 오래된 원앙 이불을 통해 먼 길을 떠난 남편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데에 대한 아내의 원망을 표현했다.
흥미롭게도 현대 생물학 연구에 따르면, 원앙은 번식기에만 일시적으로 짝을 맺을 뿐 실제로는 짝을 자주 바꾸거나 동시에 수컷이 여러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원앙이 지닌 상징성을 흔들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도 원앙은 사랑과 온정의 상징으로 중한 양국의 전통과 현대의 정서적 공감대를 이어주고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