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9
고대 어요창에서 오늘날의 야시장 노점에 이르기까지, 징더전과 도자기의 인연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가마의 불꽃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를 거듭해 전통을 지켜 온 장인의 계승과 헌신 덕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위얼메이 여사의 도자기 궁전
여생을 바쳐 ‘도자기 궁전’을 지은 노부인
징더전 푸량(浮梁)현 신핑(新平)촌의 작은 언덕에는 토루식 원형 건물 몇 채가 서 있다. 건물 외벽 전체에 형형색색의 도자기 병과 도자기판, 도자기 파편이 빼곡하게 박혀 있어 햇빛을 받으면 겹겹이 쌓인 유약 빛이 반짝인다. 이곳은 바로 위얼메이(余二妹) 여사가 7년에 걸쳐 지은 ‘도자기 궁전’이다.
위 여사의 삶은 ‘도자기’ 그 자체였다. 12살 어린 나이에 외삼촌의 도자기 공방에 들어가 수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해 허드렛일하는 보조공에서 국영 도자기 공장의 기술자가 됐다.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자 자신이 직접 장작 가마를 지어 올리고 도자기 공장을 운영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모은 도자기 소장품이 6만여 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는 맥이 끊겨 구할 수도 없는 장작 가마의 오래된 도자기였다. 거액을 제시하며 희귀한 도자기를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모두 정중히 거절했다.
2010년, 출장차 톈진(天津)에 갔던 그는 현지의 도자기 박물관인 츠팡쯔(瓷房子)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징더전은 명색이 도자기의 본고장인데, 왜 우리에겐 도자기 궁전 하나 없을까?”
그저 스쳐 지나간 생각처럼 보였던 한마디는, 훗날 그가 남은 인생을 바치는 집념이 됐다. 여든하나의 나이에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털어 넣었고, 모자란 공사비는 집과 살림을 팔아 마련했다. 공사장 옆 간이 숙소에 거처를 잡고 직접 현장을 지켰다. 손수 도면을 그리며, 인부들과 어깨를 맞대고 도자기 조각 하나하나를 벽에 박아 넣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1200㎡ 규모의 3층짜리 도자기 궁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천 년 동안 가마 불꽃이 이어져 온 징더전에서, 한 사람의 삶이 또 하나의 도자기 전설로 피어난 순간이었다.
도자기 궁전이 완공된 뒤 위 여사는 모두를 놀라게 한 결정을 했다. 도자기 궁전 전체를 현지에 무상으로 기증해 관광지로 개방한 것이다. 그는 “도자기 궁전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도자기 문화를 사랑하는 모두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 여사의 도자기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자기 궁전을 필두로 한 건축군을 조성해 나갔다. 2024년, 93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도자기 궁전은 지금도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로 늘 활기가 넘친다. 중국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도자기 궁전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일은 어느새 징더전을 찾는 관광객에게 특별한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궁전 안에서는 빛과 그림자, 영롱한 유약의 빛깔이 서로 어우러져 고요히 흐른다. 그리고 이곳을 찾은 모든 이에게 말없이 일러준다. 마음속에 사랑과 열정이 있다면, 세월은 결코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고.

섬세하게 투각된 문양 사이로 빛이 스며들며, 영롱자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새로운 문을 연 젊은 선구자
징더전에는 위 여사처럼 평생을 도자기에 바친 사람이 많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오래 묵은 도자 산업에 다시 생기가 돌고 있다.
90허우(後, 1990년대 출생자) 뤼야팅(呂雅婷) 장인은 5대째 도자 산업에 종사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2014년 해외 유학을 마치고 징더전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바로 유약 작업장에 배치돼 현장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흙의 종류를 구별하고 가마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작업장을 돌며 실무를 배웠다.
몇 년 뒤 그는 영롱자(玲瓏瓷) 제작 과정을 체계적으로 익혔고, 관련 무형문화유산 항목의 젊은 전승자 중 한 명이 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경험을 쌓을수록 한 가지 문제의식이 분명해졌다. 전통 기법은 아름답지만, 현대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기에는 생산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영롱자의 핵심 공정은 얇은 자기 표면에 구멍을 내는 투각 작업이다. 장인은 얇게 빚은 태토에 쌀알만 한 구멍을 하나하나 새긴 뒤, 그 안을 유약으로 메워 다시 구워낸다. 제작에 성공하면 구멍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마치 별빛처럼 반짝인다. 숙련된 장인이 순전히 수작업으로 하루에 낼 수 있는 구멍은 수백 개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눈을 부릅뜨고 작업하다 보면 눈이 시큰해지기 일쑤다. 게다가 한 순간이라도 손이 어긋나면 자기 한 점을 버려야 한다. 생산량을 늘리기 어려운 탓에 가격도 낮출 수 없고, 영롱자는 일반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물건이 되고 말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늘 ‘높은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한쪽에는 정교하지만 대량 생산이 어려운 장인의 기술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활 도자기를 찾는 대중의 눈높이가 있었다.” 끊임없는 고심 끝에 그는 전통과 대중성, 그 사이의 문을 터주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뤼 장인은 “가마 속 불꽃에 깃든 혼은 지키되,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대량 생산의 길을 열기로 말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뤼 장인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소장 가치가 높은 작품에는 전통 수공예 기법을 고수하는 한편, 일상용 제품에는 컴퓨터 수치 제어 정밀 조각 기술을 적용해 투각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생산 효율이 크게 향상됐다. 그는 공방 직원들과 함께 팽이컵, 오뚝이컵, 이모티콘컵 등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영롱자’라는 전통 기법을 이들의 일상에 스며들게 했다.
이 젊은 장인은 무형문화유산이 박물관 안에만 머문다면 진정한 의미의 계승은 어렵다고 말한다. “더 많은 이가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스스럼없이 찾게 될 때, 이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계속 나올 것이다.”

징더전에서 도자기의 매력에 빠진 외국인 관광객들
프랑스에서 온 ‘징더전 노마드’
오늘날 징더전은 많은 젊은이의 마음속 ‘유토피아’가 됐다. 수많은 디지털 노마드와 문화예술 종사자가 영감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어 적은 비용으로 창업하거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징더전 노마드(景漂)’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는 바다를 건너 찾아온 외국인도 적지 않다.
시내 남동쪽에 있는 타오시촨(陶溪川) 문화창의지구는 옛 국영 도자기 공장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수백 개의 공방과 갤러리, 카페가 들어서 있다. 주말 마켓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젊은이 중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프랑스령 레위니옹섬 출신의 커양(柯楊)도 그중 한 명이다.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그는 늘 자신의 창작에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2017년 학술 교류로 처음 징더전을 찾았을 때, 그는 한 오래된 공방에서 60대 장인이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장인은 단 몇 분 만에 흙덩이 하나를 매끈하고 정갈한 모습의 사발로 만들었다. 그는 그 곁에 서서 오후 내내 작업을 지켜봤다. 그런 그에게 장인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한마디만 건넸다. “손은 흔들림이 없어야 하고, 마음은 차분해야 한다네.”
귀국한 뒤에도 커양은 징더전에서의 여운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2024년,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징더전을 찾았다. 푸량현 란톈(蘭田)촌에 작은 마당이 딸린 집을 빌려 공방을 꾸리고, 이곳에서 ‘징더전 노마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징더전은 모두가 흙과 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커양은 웃으며 말했다. “어디에서 왔던 전통을 충분히 존중하고 기술에 진심을 다한다면 이곳 사람들은 여러분을 한 식구처럼 받아줄 것이다.”
오늘날 커양처럼 징더전에서 터를 잡고 도예를 배우거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외국인 도예가가 수천 명에 이른다. 유럽과 아시아, 미주 등지에서 찾아온 이들은 징더전의 도자 문화를 세상 곳곳으로 널리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