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칼럼 >> 본문

고대 중한의 역사문화 속 영지


2026-04-01      



영지는 진균류의 일종으로, 예로부터 중한 양국에서 진귀한 약재로 여겨져 왔다. 이는 기를 보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기침을 멎게 하고 숨찬 증상을 완화하는 효능이 있는 건강에 이로운 식품이다.


영지와 중국의 의약 양생 문화

영지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선진(先秦) 시대 문헌 <산해경(山海經)>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문헌에서는 영지를 ‘신지(神芝)’, ‘불사초(不死草)’라고 적고 있어 영지가 장수와 연관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秦)·한(漢) 시대에는 방사 문화(方士文化, 신선과 불로장생을 추구한 신비주의 문화)가 성행하면서 영지는 신선의 ‘선약(仙藥)’으로 여겨졌다. 서한(西漢) 시대 <열선전(列仙傳)>에는 서주(西周)의 개국 공신 강자아(姜子牙, 강태공)가 영지를 복용하고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한(東漢) 시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지(芝)’를 ‘신초(神草)’라 풀이했다. 도교에서도 영지를 단약(丹藥,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데 보조로 쓰이는 ‘영초(靈草)’로 여겼으며, 송(宋)나라 시기 <운급칠첨(雲笈七簽)> 등 도교 경전에는 영지의 채집 의식과 복용 시 금기 사항 등이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


영지는 오래전부터 중국인에게 귀한 보약으로 여겨졌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영지의 약성을 상세히 기록한 가장 이른 문헌으로, 영지를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며 늙지 않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북송(北宋) 시기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영지를 적지(赤芝), 흑지(黑芝), 청지(青芝), 백지(白芝), 황지(黃芝), 자지(紫芝)의 여섯 종류로 구분했다. 명(明)나라 시대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이 여섯 종류 영지 각각의 의학적 효능을 상세히 서술했다. 다만 오늘날 중국 약전에서는 약으로 쓰일 수 있는 영지 품종을 적지와 자지(紫芝) 두 종류로만 규정하고 있다.  


한(漢)나라 시대부터 영지는 ‘제왕덕정(帝王德政, 군주가 덕을 바탕으로 베푸는 올바른 정치)’의 상서로운 징조로 인식됐다. 한무제(漢武帝)는 궁중에 영지가 자라자 대대적인 사면을 진행하고 ‘지방(芝房)’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진(晉)나라의 학자 곽박(郭璞)은 영지를 ‘서초(瑞草, 상서로운 풀)’라고 여겼다. 송(宋)나라의 진종(真宗)은 영지를 채집하도록 명하고 이를 봉안할 전각을 세웠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안에는 3만 개가 넘는 영지가 있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는 원(元)나라 시대 궁궐에 진상된 영지를 여행기에 기록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선교사들이 가져온 표본을 통해 비로소 영지의 실물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영지를 ‘동방의 신비한 진균’이라 불렀다.


명(明)·청(淸) 시대에는 직물, 칠기, 옥 조각 등에 영지 구름무늬가 널리 사용됐는데, 이를 ‘여의두(如意頭)’라 하여 길상과 순조로움을 상징했다. 오늘날에도 베이징(北京)의 고궁(故宮), 이화원(頤和園) 등 역사 건축물에서 영지 문양이 새겨진 석조를 볼 수 있다. 

   

또한 영지는 중국 문학에서 은일(隱逸)과 고상한 품격을 상징하는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서는 뜻이 고상하고 행실이 청렴결백한 것을 영지에 비유했고,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신선이 영지를 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글을 짓다(仙人採靈芝, 翻作救世篇)’라는 시구로 이상을 노래했다. 송나라 시대 <선화화보(宣和畫譜)>에 ‘묵죽영지(墨竹靈芝, 먹으로 그린 대나무와 영지)’ 부문이 별도로 마련된 이후, 중국 회화에서 영지는 소나무와 기암, 학과 함께 자주 등장하며 ‘아(雅)’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각적 부호로 자리매김했다.


남송(南宋)의 진인옥(陳仁玉)이 저술한 <균보(菌譜)>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식용 버섯 전문서로, 저장(浙江) 룽취안(龍泉) 사람들의 영지 재배 기술이 기록돼 있다. 늦어도 12세기 초 이전부터 룽취안에서는 영지의 인공 재배가 광범위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룽취안은 ‘중화 영지의 본고장’이라 불린다. 오늘날 이 지역의 영지 관련 산업의 총생산 가치는 40억 위안(8400억 원)을 넘어서며, 식사·숙박·관광·오락·교육을 아우르는 영지 문화 건강 산업 및 휴양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한때 선초로 여겨지던 영지는 이제 일반 대중도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건강식품이 됐다.


한국 역사 속 영지,

상서로움의 징표를 둘러싼 논쟁

이미 신라 시대부터 사람들은 영지를 진귀한 물건이자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지방 관리가 여러 차례 영지를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지를 ‘서지(瑞芝)’라 불렀다.


고려 건국 원년(918년) 일길찬(一吉粲, 관등명) 능윤의 집에서 ‘서지’가 자라났는데, 이를 태조 왕건에게 바치니 내창(內倉)의 곡식을 하사했다. 충숙왕 때는 미륵사 승려가 기이한 풀을 왕에게 바쳤고, 그것이 영지로 여겨져 후한 상을 받았다.

    

1392년 경산 부사 이황이 영지 하나를 얻었고 이를 길조로 여겨 조선 태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정도전은 태조에게 상서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할 것을 건의하며 ‘상서로운 봉황이 온갖 새 가운데서 그렇고 영지가 평범한 풀들 가운데서 그렇듯, 그것들의 탄생은 기이하고 특별하다’고 했다. 세종 때에는 조선 왕릉의 지대석과 우석에 영지 무늬를 새기는 산릉(山陵) 제도가 확립됐는데, 이는 왕이 사후에 신선 세계로 승천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상징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선 후기 문신 장현광이 태어날 때 산에서 영지가 자라났고 자색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품성이 고결했던 그는, 유성룡의 천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조의 존경과 송시열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박제가의 <정유집>에는 ‘영지와 감로는 그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의 길조로 여겨진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영지를 상서로운 징조로 보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려 예종은 당(唐)나라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인용해 신하들을 훈계했다. 즉,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면 상서로운 징표가 없더라도 군주의 덕행이 요순(堯舜, 성군의 대명사)에 견줄 만하지만, 반면 백성이 고통받는다면 설사 영지와 봉황이 나타난다 해도 군주는 걸주(桀紂, 천하의 폭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정인지는 조선 문종에게 영지와 같은 기이한 자연물을 맹신하지 말 것을 간언했다. 문신 김재현은 조선 철종에게 국가에 있어 가장 큰 상서로움은 곡식의 풍년이라고 말했다.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과 같으니, 현명한 군주는 영지를 기이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좋은 곡식을 길한 징조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는 고대 한국에서 여전히 장수 약초로 여겨졌다. <동의보감>에도 영지의 약성과 효능이 수록돼 있다. 민간에서는 영지를 불로초라 불렀으며,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경복궁 자경전에는 ‘십장생’ 그림이 새겨진 굴뚝이 있는데, 이는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왕실 어른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컨대 중한 양국의 영지 문화는 모두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신화적 신앙과 의약 실천, 철학 사상과 예술적 미의식을 아우르는 공통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240

< >
微信图片_20260302134546_2857_16.png

베이징 싼리툰 한복판의 ‘서울 풍경’

2022년 중국 베이징(北京)에 와서 처음 싼리툰(三里屯) 쇼핑몰 타이쿠리(太古里)를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읽기 원문>>

서로를 향한 선택, 중국 브랜드와 한국 소비자의 만남

얼마 전 베이징(北京)에서 서울로 출국할 준비를 하면서 한국 친구에게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