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6

장시성 상라오시 우위안현 황링촌의 휘파 민가는 전통적인 천정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청색 벽돌과 회색 기와가 에워싼 이 노천 공간은 주민들이 볕을 쬐고 빨래나 곡식을 말리는 실용적인 공간이자 후이저우 ‘사수귀당(四水歸堂)’ 건축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진/VCG
우위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뿌리인 옛 휘주부터 살펴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휘주부(府)는 6개 현(縣)으로 구성됐고 그중 하나가 우위안이다. 이 지역은 산수가 수려하지만 ‘산이 팔 할 반, 논밭이 한 할, 나머지 반 할이 물길과 장원(莊園)’인 지리 적 환경 때문에 경작지가 턱없이 부족해 민생들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바로 이런 혹독한 생존의 압박이 당(唐)·송(宋) 시기 이후 특히 명·청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휘주 사람들을 깊은 산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상업 활동으로 활로를 모색했고, 결국 중국 역사상 진상(晉商)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업 집단인 휘상(徽商)이 탄생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어떤 업종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활동 범위가 중국 전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까지 뻗어 나갔으니 “휘상이 없으면 마을도 형성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같은 활약은 중국 강남의 시·진(鎭)이 흥성하고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휘상의 가장 큰 특징은 ‘상인이면서도 유학을 숭상한다(賈而好儒)’는 것이다. 그들은 유가(儒家) 문화를 깊이 존중해 많은 재물을 모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사당을 짓고 저택을 짓고 교육을 장려했다. 이 과정에서 부와 유가의 윤리 관념, 심미적 정취가 고향의 벽돌과 기와, 나무와 돌 사이에 스며들었다.
천정과 마당 사이에 응축된 부와 성공의 신앙
휘상의 거상들이 일군 옛 마을인 장완(江灣)에 들어서면 마치 입체적으로 펼쳐진 휘주 문화의 역사서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전체 건축군에는 절제미가 흐르고 우아한 격조가 느껴진다. 통일된 청회색 기와와 소박하면서도 깨끗한 흰 벽, 그리고 준마가 하늘로 비상하는 듯 천제선을 그려내는 가장 상징적인 마두장이 반긴다. 이 높은 담벼락은 화재를 차단하는 실용적인 기능도 있지만 옛 마을의 윤곽에 층차를 주어 리듬감을 부여한다.
두텁고 육중한 ‘상(商)’ 자 모양의 문(상인을 존중한다는 문루의 한 형태)을 밀고 깊숙한 현관을 지나면, 마침내 후이파 건축의 핵심인 천정(天井, 채광용 정원)이 나타난다. 천정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건물의 정교한 디테일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비춘다. 나라의 부와도 맞먹을 만큼 막대한 재력을 지녔던 휘상은 평생 일궈온 재물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 작은 공간의 조성에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그들은 천정을 둘러싼 들보와 창살, 난간 그리고 문루의 벽돌 조각과 문미(門楣)의 돌 새김 안에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열망과 학문이나 농업으로 가풍을 잇고자 하는 이상을 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는’ 문양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이는 과거 시험과 상업 활동을 통해 운명을 바꾸고자 했던 휘주 사람들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부가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자, 동시에 신앙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장시성 상라오시 우위안현 황링촌 휘파 민가의 천정 옆에서 위유구이 무형문화유산 전승자가 전통 공예 기법에 따라 고택의 목조 부재를 정성스럽게 복원하고 있다. 사진/IC
삼조 위에 새겨진 전승과 새 생명
이 좁은 공간에 펼쳐진 예술이 바로 휘파 건축의 혼이라 일컫는 ‘휘주 삼조(徽州三雕)’, 즉 목조(木雕), 석조(石雕), 전조(磚雕)의 세계다. ‘휘주 삼조’는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시작돼 청나라 순치(順治), 건륭(乾隆) 시기에 이르러 휘상의 재력이 정점에 달하자 그들은 고향에 앞다퉈 저택과 종사(宗祠)를 지어 가문을 빛냈고, ‘삼조’ 기예도 이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그 조각의 정교하고 화려함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낼 만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들 조각은 소재가 매우 다양하고 문화적 함의가 매우 풍부하다. 목조는 주로 들보 창살, 난간에서 많이 보인다. 심부조와 투조 기법으로 역사 인물과 ‘도원결의(桃園結義)’와 같은 희곡 이야기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석조는 주춧돌, 포고석(抱鼓石), 문미에 두루 쓰이며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대나무·매화나 집을 지키는 상서로운 짐승을 많이 새겼다. 문루와 문틀에 장식된 전조에선 또 다른 예술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숙련된 장인의 손끝에서 수마청전(水磨靑磚)은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겹겹이 쌓인 입체감과 섬세한 조각술은 산수와 화조, 인물의 형상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풍경처럼 숨 쉬게 한다. 삼조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자인 위유구이(俞有桂)는 잉어가 용문에 뛰어넘는 조각 문양을 가리키며 “이 제재(題材)는 우위안 건축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과거 시험이나 상업 활동을 통해 운명을 바꾸겠다는 휘주 사람들의 강렬한 소망을 잘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위유구이는 장완진 왕커우(汪口)촌에서 태어났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 건축된,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조로 유명한 위(俞)씨 종사가 그의 예술혼을 깨우쳐준 스승이었다. “위씨 종사의 두공, 치미, 서까래, 보, 까치발, 주춧돌 어느 것 하나 형식에 어긋남이 없으니, 그야말로 신의 솜씨와 같다.” 위유구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 장식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창작 열정이 샘솟는다.” 14세 때 스승에게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목공의 핵심 기법을 익힌 그는 안후이(安徽)와 푸젠(福建), 광둥(廣東) 등지로 나가 각 유파의 장점을 습득한 뒤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했다. 현재 우위안의 고건축 복원, 민박 조성 더 나아가 관련 굿즈 개발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삼조’ 예술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위유구이와 그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