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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학루와 고대 한국


2026-04-22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 있는 황학루(黃鶴樓)는 장시(江西)성의 등왕각(滕王閣), 후난(湖南)성의 악양루(岳陽樓), 산시(山西)성의 관작루(鸛雀樓) 혹은 일설에 따르면 산둥(山東)성의 봉래각(蓬萊閣)과 함께 고대 중국 4대 명루로 꼽히며, 유구한 역사와 함께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황학루의 역사와 문화 상징

서기 223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은 창장(長江) 강변에 하구성(夏口城)을 축조하고 성 남서쪽의 황곡기(黃鵠磯)에 군사용 망루를 세웠다. 이것이 황학루의 최초 모습이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 <술이기(述異記)>에는 강릉(江陵) 사람 순환(荀環)이 황학루에서 학을 타고 온 신선을 만나 그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황학루’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이다. 이 기록은 훗날 사서 <남제서(南齊書)>에도 수록됐다.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황학루는 단순히 경치를 보는 장소를 넘어 연회와 송별, 시회(詩會)가 열리는 공간이 됐다. 특히 서기 723년, 최호(崔顥)는 칠언율시(각 7글자 씩 모두 8구로 구성된 시) <황학루>를 지었다.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고, 이곳엔 덩그러니 황학루만 남아 있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 년을 유유히 떠 있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는 절창을 남겼다. ‘황학’이라는 시어를 세 차례나 연달아 사용하며 전통 시가의 격식을 과감히 깨트린 이 시는 ‘당나라 칠언율시 중 으뜸’이라 찬사를 받았다.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당나라 문인도 황학루를 소재로 시를 지어 황학루는 문학 창작의 대표적인 상징이 됐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황학루를 노래한 시가 1000여 수 이상으로 중국 시가 정신사의 축소판이 됐다.


원(元)나라 하영(夏永)이 그린 <황학루도(黃鶴樓圖)>에는 당시 황학루의 형태와 구조가 묘사돼 있다. 층차가 분명하고 웅장한 모습 뒤로 저 멀리 산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이고 하늘에는 도사가 학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길 위의 행인은 무릎을 꿇거나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을 하는 모습이 황학루의 전설을 생동감 넘치게 보여준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는 비록 황학루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강한선종(江漢仙蹤)’이라는 네 자의 현판을 하사해 황학루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1927년 마오쩌둥(毛澤東)은 황학루에 올라 <보살만(菩薩蠻)·황학루>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역경 속에서도 충만한 자신감과 너른 포용력,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황학루는 1800여 년 역사 속에서 전란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됐다가 재건되어 형태와 스타일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황학루가 이미 중국 문화와 역사 기억의 일부로 깊이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고대 한국의 시문 속 황학루

고려의 이색은 여러 편의 시에서 ‘황학루’의 이미지를 즐겨 활용하며 이를 쉬이 닿을 수 없는 선경의 경지로 그려냈다. 한편 <우립추일기경지(右立秋日寄敬之)>에서는 ‘황학루’를 벗을 떠나보내는 장소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1377년 여름, 유배 중이던 삼봉 정도전은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공주 금강루를 지나던 중 감회에 젖어 시를 지었다. 금강루에서 황학루를 떠올린 그는 누각 앞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모든 공명과 부귀영화는 그저 천 년을 떠도는 뜬구름처럼 덧없을 뿐이라고 읊었다.


1423년 조선 세종은 명(明)나라 사신 두 명을 대접하기 위해 경회루에서 연회를 열었다. 명나라 사신은 이곳의 경관이 중국의 황학루와 취선루(醉仙樓)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감탄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시대까지 황학루를 그린 그림과 병풍이 귀족과 사대부의 애장품이 됐다. 이색은 친구가 소장한 황학루 병풍에 시를 지어 올렸는데, “최호의 시 한 수로 천지가 넓어졌고, 적선(이백)의 시 또한 풍류가 넘친다(崔顥一題天地闊, 謫仙詞調亦風流)”라고 표현하며 당나라 문호들이 쓴 황학루 시를 격찬했다.


1478년 조선 성종은 소장하던 <황학루도>를 특별히 꺼내 승정원과 홍문관에 이것을 소재로 율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1479년 성종은 직접 <황학루도>를 위한 시를 짓고 그림 위에 직접 써넣은 뒤, 제비뽑기 방식으로 이 그림을 대신에게 하사했다. 문인 서거정 역시 <제황학루도(題黃鶴樓圖)>와 <제신전첨가장팔첩병풍·황학루(題申典簽家藏八疊屛風·黃鶴樓)> 등의 시를 남겼다.


1536년 조선 중종은 경회루 아래에서 활쏘기를 관람하다가 흥이 오르자, 황학루를 주제로 오언율시를 짓고 주변 대신들에게도 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1767년, 조선 백성 27명이 중국으로 표류했다가 무사히 귀환한 일이 있었다. 그들의 경험을 자못 궁금히 여긴 영조가 직접 백성들을 불러 하문했다. 이들은 황학루를 직접 봤다고 아뢰었는데, 누각은 9층에 달하였고 창문마다 각기 다른 무늬의 형형색색 비단이 발라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반도(한반도)에도 존재했던 황학루

<여지도서(輿地圖書)> 기록에 따르면, 경주에도 한때 황학루가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훼손돼 사라졌다고 한다. 문신 남용익은 경주에서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표현한 시를 지어 ‘황학루공유옥적(黃鶴樓空唯玉笛)’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황학루에는 이미 사람도 누각도 사라지고 옥피리 소리만 남아 울려 퍼진다는 뜻으로, 최호가 쓴 ‘황학루’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동시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경주의 황학루를 함께 빗댄 표현이다.


조선 시대 평안도 삼등군에도 황학루가 있어 명성이 자자했다. 그 인근에는 중국 황학루 경관을 본떠 이름을 붙인 ‘앵무주(鸚鵡洲)’가 있었으며, 심지어 ‘적벽(赤壁)’이라는 지명도 존재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삼등군에서 이 누각을 황학루라고 부른 이유는 이백이 세 차례 황학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을의 명칭인 ‘삼등’ 역시 이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등의 황학루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관서8경(關西八景) 중 하나로 꼽혔다. 조선의 문인들은 이 누각에서 많은 제시(題詩)를 남겼다. 문인 심노숭은 누각에서 좋은 시를 읽고 <남천일록(南遷日錄)>에 기록했다. 홍양호는 두 차례 삼등 황학루를 찾아 누각에 시를 남겼다.


박윤원은 누각에 올라 <황학루기(黃鶴樓記)>를 썼다. 그는 중국 황학루의 이름이 신선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 유가 사상에 부합하지 않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또한 삼등 황학루가 ‘황학루’의 이름을 차용한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삼등 황학루의 아름다운 풍경을 좋아했지만 그 명칭이 실상과 걸맞지 않아 안타까워했다.


1824년 김조순은 삼등 황학루에 올라 현지 관리들의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누각 위에서 바라본 수려한 경관에 도취한 그는 글을 지어 이곳을 관서 제일의 절경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듬해 삼등 황학루가 큰 화재로 소실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상심에 빠졌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한 황학루에서 삼등 황학루에 이르기까지, 황학루의 문화적 함의는 고대 한국인도 친숙했을 뿐 아니라 현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피어났다.


마지막으로 한국 친구들이 중국 우한을 방문해 직접 황학루에 올라, 이 도시가 품은 천 년 역사와 현대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시대의 장관을 몸소 느껴 보길 바란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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